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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동 전 국무총리가 8일 별세하셨습니다. 향년 87세.

삼가 고인의 명복들 빕니다.

 

이 전 총리의 측근은 이날 연합뉴스에 "이 전 총리가 낮 12시30분께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밝혔습니다.

빈소는 건국대병원 장례식장에 9일 마련되며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지고 조문은 정오 이후 가능합니다. 발인은 11일입니다.

 

 

고인은 보수진영의 상징적 인물로 통했습니다.  입법·사법·행정 3부에서 화려한 관록을 쌓은 그는 특히 5공 군사정권 시절부터 김영삼·김대중·김종필 '3김(金) 시대'의 정치 격변기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6선 의원을 했고 내무장관, '당 3역'인 원내대표·사무총장·정책위의장, 국회부의장을 거쳐 국무총리까지 요직을 섭렵했습니다.

율사 출신답게 정연한 논리를 구사하면서도 호탕한 성격의 호걸형으로, 친화력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출처 연합뉴스

협상을 앞세우면서도 중대 결정에서는 과단성이 돋보여 '단칼'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통합의 정신을 강조하는 '해불양수'(海不讓水·바다는 어떤 물도 사양하지 않는다)가 좌우명입니다. 2018년 발간한 회고록 '정치는 중업(重業)이다'에서도 타협과 대화의 정치를 강조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초당적 협력과 협치를 중시했던 의회주의자이자, 통 큰 정치를 보여준 거목"이라고, 국민의힘은 "대화와 타협을 중시한 의회주의자"라고 일제히 애도했습니다.

출처 중앙일보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경복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서울지법 판사와 서울지검 검사를 거쳤습니다. 판사에서 검사로 전관한 국내 최초 사례로 알려졌습니다.

 

전두환 정권 출범 직후인 1981년 11대 총선에서 민정당 소속으로 당선됐으며 16대까지 내리 6선을 기록했습니다.

노태우 정부에서는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습니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에서 각각 한 차례씩 모두 세 차례 원내총무(원내대표)를 맡았으며 대화와 타협을 존중해 여야 의원들로부터 '이한동 총무학'이란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출처 동아일보

그러나 대권과는 연이 닿지 않았습니다. 1997년 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른바 '9룡'(龍)의 한 명으로 이회창 이인제 후보 등과 맞붙었으나 이회창 대세론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대선 후 탈당해 김종필(JP) 전 총리 중심의 자민련 총재로 변신하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DJP연합'으로 출범한 김대중(DJ) 정부에서는 김종필 박태준 전 총리에 이어 3번째로 총리직을 맡기도 했는데 헌정사상 처음으로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된 총리였습니다.

 

2002년에는 '하나로국민연합'을 창당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이후 한나라당에 복당해 원로역할을 하다 정계 은퇴했습니다.

 

슬하에 지원·용모(건국대 교수)·정원(고려사이버대 교수)씨 등 1남 2녀를 뒀으며 두 사위는 허태수 GS그룹 회장과 김재호 동아일보·채널A 사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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